그리스와 덴마크의 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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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그리스 왕국의 니콜라오스 왕자와 러시아 제국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장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섭정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의 아내이자, 영국의 왕자비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공주의 언니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03년 6월 11일 그리스 왕국 타토이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오스 왕자는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의 3남이었고, 어머니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은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2세의 손녀였다. 이름은 친할머니 올가 왕비로부터 따와 지어졌다.
1904년에는 여동생 엘리사베트가, 1906년에는 마리나가 태어나 언니가 되었다. 올가는 비교적 소박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종종 외가인 러시아 제국에 방문해 또래 육촌들인 올가 여대공, 타티야나 여대공, 마리야 여대공, 아나스타시야 여대공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2.2. 제1차 세계대전[편집]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 여부를 두고 콘스탄티노스 1세와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혼란한 상황에서 1915년부터 그리스는 연합국에 의해 부분적으로 점령되었고, 그리스 왕족들은 모두 망명을 떠나야 했다. 올가와 가족들은 아테네를 떠나 생모리츠에 정착했다.
1920년에 큰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잠시 복위함에 따라 올가는 잠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1922년에 다시 퇴위하면서, 올가는 런던과 파리 등지로 이동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2.3. 파혼과 결혼[편집]
올가와 여동생 마리나는 당대 가장 아름다운 공주 중 한명이었다. 망명을 떠나기 전인 1922년, 올가는 육촌 친척 덴마크의 프레데릭 왕세자와 약혼했다.[2] 하지만 군중에 약혼을 발표할 때 프레데릭 왕자는 올가 대신 그녀의 여동생의 손을 잡는 실수를 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창피함을 느낀 올가는 약혼을 파기했다.[3]
이후 올가가 누구와 결혼할지에 대한 많은 소문이 돌았다. 그 중에서는 훗날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에드워드 왕자도 있었다. 그러던 중 올가는 한 무도회에서 유고슬라비아의 파블레 왕자를 만났다. 올가의 아름다운 미모에 반한 파블레 왕자는 올가의 호감을 사려 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후 몇 차례의 만남을 더 가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1923년 7월 26일, 올가는 파블레 왕자와의 약혼을 발표했고, 10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왕자비가 된 올가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빠르게 습득했다. 올가는 남편의 재산으로 풍족한 삶을 누렸으면서도, 단조로운 삶에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다. 또, 유고슬라비아 국왕 부부인 알렉산다르 1세와 루마니아의 마리아와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인 파블레 왕자와 사이에서 알렉산다르 왕자, 니콜라 왕자, 옐리사베타 공주를 낳으며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
1934년 10월 9일 유고슬라비아의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암살당하고, 그의 어린 아들 페타르 2세가 즉위했다. 당시 페타르 2세의 나이가 겨우 11세였기 때문에 파블레 왕자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올가는 섭정의 아내로서 여러 차례 해외에 방문했으며, 특히 로마와 베를린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기도 했다.
2.4. 제2차 세계대전[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파블레 왕자는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고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에 가입시켰다.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페타르 2세는 군 장교들과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결국 파블레 왕자와 올가, 그리고 세 자녀들은 체포되어 영국에 넘겨졌다. 올가와 가족들은 영국령 케냐에 억류되었으며 남편 파블레 왕자는 우울증에 걸렸다. 올가는 케냐에서 요리를 배우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 전념했다.
1942년, 매부 켄트 공작 조지 왕자가 비행기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여동생 마리나 공주가 큰 슬픔에 빠졌다. 이에 영국 정부는 마리나를 위로하기 위해 올가가 영국에 잠시 머물도록 허용했다. 1943년 1월, 올가가 케냐로 돌아왔지만 남편 파블레 왕자의 우울증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영국 정부는 올가 가족이 남아프리카 연방에 정착하도록 허용해 주었다. 그곳에서 올가는 국외로 망명한 여러 그리스 왕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2.5. 말년[편집]
1948년, 올가와 가족들은 마침내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이미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멸망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 탓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올가는 스위스를 거쳐 파리에 정착했다. 1954년에는 차남 니콜라 왕자가 마거릿 공주를 만나러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76년 남편 파블레가 사망한 후, 올가는 영국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다. 여동생 마리나 공주가 사망한 후에는 켄싱턴 궁전에서 앨리스 왕자비와 함께 거주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올가의 건강은 점차 쇠약해졌지만, 1978년 조카 켄트의 마이클 공자의 결혼식과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등 여러 왕실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말년에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투병하다 1997년 10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9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유해는 스위스 로잔의 부아드보 수도원에 남편, 아들 니콜라 왕자와 함께 안장되었다가 2012년에 세르비아로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3.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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